K-드라마, 초기에는 이랬습니다!

한국 드라마는 K-pop과 함께 한류를 일으킨 두 날개 중 하나입니다.나는 텔레비전도 없고 드라마를 자주 보는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그래도 유튜브를 보면 K-drama가 여전히 강세인 것은 알지요.최근 우연히도<드라마 한국을 말해>(김·화은표 지음 2012년, 인물과 사상사)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표지에는 “최초의 드라마사이면서 드라마에서 보는 사회 문화사”라는 설명이 부가되어 있습니다.머리 글자에는 “드라마를 따뜻한 시선으로 접한다!”라는 제목이 붙고 있습니다.드라마, 한국을 말하다!한국에는 드라마에 대한 뜨거운 사랑 못지않게 비윤리적 드라마 다라 뭐라고 신랄한 비난이 적지 않았어요.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한 저자는 드라마 애호가입니다.K-드라마가 K-팝과 함께 한류를 이끄는 쌍두 마차이어서 이에 걸맞은 대우를 한국인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너무 비판만 하지 마세요.저는 과거 드라마, 특히 사극 중에서 관심을 끌것만 골라서 보는 입장입니다만, 저자의 안타까운 호소에 한 표를 던지다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저자의 덕분에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목록(한 아래) 할 수 있게 되었다 힘들어요.이 문장은 한국 국민의 큰 관심을 모은 몇가지 드라마를 소개하는 형태로 진행시킵니다.양이 많아 아마 몇 차례 한다고 생각합니다.한국은 일본 통치 시대의 1927년 2월 16일에 개국한 “경성 방송국”을 통해서 라디오 드라마가 시작되었습니다.1956년 5월 12일에 개국한 최초의 방송사 HLKZ-TV(아시아에서 필리핀, 일본, 태국에 이어4번째)으로 텔레비전의 흑백 드라마가 시작되었습니다.1962년 1월 19일에 개국한 국영 방송국 KBS, 1964년 12월 6일에 개국한 상업 방송의 TBC, 1969년 8월 8일에 개국한 MBC에서 드라마가 경쟁적으로 방송되었습니다.1980년 12월 1날에 컬러 텔레비젼이 등장하는 컬러 드라마가 시작되었습니다.1980년 12월 하루, TBC가 KBS2로 개편되면서 KBS1, KBS2, MBC가 경쟁 체제에 들어갔습니다.1991년 12월 9일에 상업 방송 SBS가 만들어 KBS, MBC, SBS의 3부처 간에 본격적인 경쟁이 벌어졌어요.2000년 이후”꿈의 시청률”로 불리는 시청률 50%를 넘은 드라마를 MBC에서 5개, KBS에서 1개, SBS에서 1개를 냈습니다.1. 라디오 드라마(1927년~)일본은 식민지 지배용 매체로서 활용하기 때문에 1927년에 JODK”경성 방송국”을 만들었습니다.경성방송국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라디오의 오락 기능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이 오락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라디오 드라마는 ‘무대극 실황 중계’라고 할 정도로 투박했지만 아나운서가 목소리에 감정을 실어 내보내자 청취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고 합니다.방송 시작식 오늘 오후 1시……당시의 라디오 드라마는 가정의 비극을 주요 레퍼토리로 했대요.왜 비극일까요?드라마 조사의 실세는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로 그들이 청취율 결정에 절대적 존재였습니다.한국 여성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드라마 소재에 열중하며 이른바”눈물의 카타르시스”에 몸서리를 쳤대요.의외로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본은 드라마를 전쟁과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이른바”목적 연극”의 등장입니다.대동아 전쟁을 찬양하고, 학도병으로 지원하도록 제작된 『 후방의 악수 』과 『 후방으로 마친 몸 』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물론 한국 사람들이 목적극 드라마에 매달릴 일은 없었습니다.너무 냉담하였습니다.해방 이후 미국 군정은 라디오를 군정의 홍보 매체로 활용하려 했지만, 한국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여전히 오락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드라마는 큰 인기였습니다만, 문제는 드라마 작가가 극소수라는 곳에 있었습니다.각본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서 HLKA서울 중앙 방송국(KBS라디오의 전신)은 1948년 3월, 방송극의 현상 모집까지 했다고 하네요.서울중앙방송국일제 시대, 아래에서 심한 고생한 후에 해방 공간에서 한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건 웃음이었습니다.방송은 드라마를 통해서 국민의 요구에 부응했습니다.전쟁을 거치면서 드라마는 방송국의 전략 상품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습니다.마침내 대히트 작품이 등장했습니다.드라마”파랑 멱홍 실”1956년 12월 22일 50년대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히는 서울 중앙 방송국”파랑 멱홍 실”이 등장했습니다.주간 연속 드라마에서 매주 일요일 밤 9시 15분부터 30분 동안 방영됬습니다만.여성과 가정 주부들은 한주일 기다리는 게 힘들다고 방송국에 항의했다고 합니다.충분히 그럴 만합니다.이 드라마는 전쟁 과부 딸이 한 남자를 놓고 벌이는 사랑과 갈등의 삼각 관계의 드라마였다고 합니다.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소재였습니다.그래도 마음을 졸여드라마였기 때문에 공전의 히트가 되었습니다.드라마의 주제까지 대박이 났습니다”(가수 송·민도/안준호·다 송)가수 송민도/안다성드라마를 듣기 위해서는 주제가도 매번 들어야 했기 때문에 대중의 귀에 쉽게 익숙해져 버린 것입니다. 멜로디가 심플하고 아름답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멜로디입니다. 청실홍실을 엮어 정성껏 청실홍실을 엮어 무늬도 곱지 않은 마음속에 나만 알고 있는 음~하고 수를 놓았습니다.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1957년에 영화화되었습니다. 그 당시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니 대단하죠?영화 ‘청실홍실’2. 흑백 텔레비전 드라마(1956년~) 1956년 5월 12일에 개국한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TV는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이 거의 없고 제작 노하우가 날로 날에 퍼진 탓입니다.미국의 원서 몇권에 의존하고 프로그램을 제작했다고 합니다.그래도 어떻게든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드라마”천국의 문”이 등장했습니다.출연자가 단 두명에 불과하다 15분 드라마였다고 합니다.1956년 9월에는 『 사형수 』라는 드라마도 찍었습니다.세트장은 사형수가 갇힌 감방 하나로, 의상이라고 교도관 역의 달란트가 방송국의 수위의 근무복을 얻어 입었대요.1959년 2월 2일에 방송국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그 이상의 드라마 제작은 없었습니다.1962년 1월 19일에 개국한 국영 방송국 KBS는 매우 원시적인 환경에서 드라마를 제작했다고 합니다.즉 드라마가 생방송이었습니다.좁은 스튜디오 안에서 2대의 카메라가 움직이며 찍었답니다.생방송의 드라마라, 도중에서 NG라도 나면?처음부터 다시 한번, 또…그러니까 달란트도 스태프도 완전히 탈진하죠.그러나 그렇게<전야>이라는 드라마가 제작했다고 합니다.KBS는 1961년 첫 탤런트 공채를 실시했습니다.2,600명이 모인 가운데 26명이 뽑혔답니다.익숙한 이름, 대금·현실, 박·주례가 김·혜자, 정·혜성, 오·현경, 최·종훈 등입니다.추억의 금성TV텔레비전의 보급률도 현저히 높아졌는데도.군사 정권에서 결심하고 수상기의 월부 판매를 실시했다고 합니다.합계 2만대의 텔레비전을 미국과 일본에서 긴급 도입하고 실시한 것이지만 경쟁률이 불과 5대 1이었습니다.1964년 12월 6일에 개국한 상업 방송 TBC는 생방송 드라마가 아니라, 녹화 드라마를 처음 선 보여 시청자의 관심을 모았다고 합니다.한국에서 처음 연속 드라마”눈이 오는구나”를 선 보였습니다.그 뒤 KBS와 TBC사이에서 열린 드라마의 경쟁은 치열하였습니다.달란트의 이중 출연도 보통입니다.그러다가 1969년 8월 8일 MBC가 개국하고 일어난 긴장한 경쟁은 탤런트 스카우트 경쟁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촉발시켰습니다.그런 가운데 처음으로 대히트 텔레비전 드라마가 나왔습니다.TBC의 “갈대”입니다.드라마”갈대”의 연속 드라마”갈대”는 1970년 3월 2일부터 1971년 1월 9일까지 인기리에 방영됬습니다.공식적인 시청률은 없지만, 이 드라마가 방송되는 매일 밤 9시 30분에 TBC가 “시청자 여러분, 문단속 단속이 잘 됬는지 확인하고 시청하세요”로 고시했습니다드라마 ‘아씨’의 출연자”갈대”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30년을 배경으로 지체가 높은 체면을 세운 양반의 집에 시집 온 갈대가 남편의 무절제한 외도와 냉대 속에서 기가 막힌 운명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인내와 온순하고 시부모님을 기르고 남편을 섬기는 내용이었어요.당시 이 드라마에 출연한 연인원은 무려 1200명을 넘어 TBC소속 탤런트 전원이 한번 이상은 출연했대요.”인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드라마가 끝나기 전에 2편의 영화가 상영되고, 주제곡도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었대요 “(가수 이·미쟈),”모두 들어 보였을 것입니다.트로트 가수들이 자주 불렀던 거요.국민가수 이미자씨의 전성기국민가수 이미자씨의 전성기와! 이거 보려고..방송국의 추정 시청률은 70%였다고 하는 거지만.학생이었던 나도 이 드라마 계속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한여름 해수욕장 백사장을 비운 작품이었습니다.영화관에서도 드라마 시간에는 아예 영화를 중단하고 관객들이 휴게실에서 드라마를 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아이들은 영구 짓을 재미 있는 놀이 중에 하나였습니다.힘든 시집살이를 시킨 시어머니 역의 배우, 박·학원 버스가 시청자로부터 지독하게 싫어했습니다.영구 역의 배우 장·우크라이나제는 너무 강한 캐릭터를 맡아서 그 후 다른 역을 연기하는 데 고생했다는 후일담도 들었습니다.후에 개그맨의 심·효은레의 영구 흉내도 인기를 모았습니다.TBC와 KBS에 밀렸던 MBC가 회심작으로 연속 드라마”계모”를 냈습니다.1972년 8월 30일부터 1973년 12월 28일까지 불과 411차례 방송되고 한국의 한일 연극 사상 최장수를 기록했습니다.『 여정 』이 방송되는 동안에는 현저히 밀리고 있었겠지만 『 여정 』이 종영한 후에는 당연히 드라마의 시청자를 끌었습니다.원래 1973년 2월 말로 끝내려고 했지만 인기를 끌자 오랜 기간 연장했습니다.”김·수현”작가의 시대를 알리는 드라마였어요.이 드라마는 완고한 가정에 후처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배려심과 폭넓은 이해로 남편 송 씨(최·블루 아무상)의 가족에게 인정 받게 되는 여성, 정숙 씨(정·양 정자 씨)의 이야기에요.드라마 ‘새엄마’일제 시대 이후 한국의 드라마라고 하는 통속극과 목적 연극으로 나눌 수 있네요.”목적 연극”은 한 집단 또는 사회의 이념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 의식이 명확하게 드러난 내용의 연극이나 영화의 일입니다.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대동아 전쟁을 찬양하고 학도병으로 지원하도록 목적)극을 만들었습니다.우리 나라의 시청자는 이런 목적 극에 끌리지 않았습니다.통속극에 몰려갔습니다.”통속극”는 통속적인 내용의 연극이나 드라마를 뜻하는 명사적 용어로 주로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이 그 주제입니다.남녀 간의 사랑이나 홈 드라마 등이요?1970년 전후, 방송사 간의 치열한 드라마 경쟁이 시작되면서 한국 드라마는 주로 통속극을 목표로 하였습니다.드라마의 주요 청취자들이 여성과 전업 주부였습니다.사회 정치적 모순에 가부장제 아래에서 괴로워하던 여성과 전업 주부는 남녀 간의 사랑과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통속극을 적극적으로 소비했습니다.당시 언론과 지식인 그룹은 이런 통속 드라마에 “저속·퇴폐”로 낙인 찍고 비판을 반복했습니다.그것이 1972년에 단행된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드라마는 군사 정권에 수난 받게 됩니다.이번 드라마의 수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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